며칠 전 남편이 제 배우자 비자를 위해 비엔나에 있는 비자청에 다녀왔습니다.
EU 국가 시민권을 가진 남편의 아내 자격으로 배우자 비자를 받으러 갔었는데
남편 없이 혼자 비자청에 갔다가 의심을 받았었죠...
관련된 이야기:
남편과 저의 결혼생활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육하원칙에 따른 진술서를 사진과 함께 하나의 파일로 만들고
결혼사진, 같이 휴가갔던 사진 등도 함께 첨부해서 비자청에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남편도 저와 같은 외국인 (몰도바 출신)이기 때문에 비자청에서 더 철저하게 검사하는 것 같습니다.
독일 같은 경우는 국제결혼시 불시에 사람들이 집을 방문해 같이 사는지 확인한다는 말도
주워 들었는데, 여기도 그러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
아무튼,
남편이 비자청에 한 번 방문해서 안멜데베샤이니궁 Anmeldebescheinigung 이란 걸 신청해야 했습니다.
EU 국가 시민으로서 오스트리아에서 장기 거주하며 일을 할시 나라에 알리고 받는 증명서입니다.
비자청은 일단 약속 잡는 것도 한국처럼 빨리빨리 되지 않습니다.
제가 간 뒤로 2주 뒤에 남편의 서류를 위한 약속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약속 당일! 저녁형 인간이라 아침잠이 엄청 많은 남편을 억지로 깨워
아침 차려주고 필요한 서류들을 쥐어주고 비자청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집안일들을 하며 집안에서 분주하게 있었는데 얼마 있다 핸드폰을 봤더니
남편에게서 서너번의 전화가 와있었습니다.
불길한 예감.... 뭔가를 빠뜨린 게 분명합니다.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남편은 이미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무슨 일 있었어?
남편의 어이없다는 얼굴이 대답을 대신해줍니다.
사건인 즉 이렇습니다.
남편의 일을 처리해준 직원이 남편의 여권 사본을 요구했는데
저희 남편은 여권만 가져갔습니다. 제가 가져가야 할 서류들이 쓰여 있는 종이에도
여권 사본이 필요하다는 말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비자청은 특히 직원을 잘 만나야 하고, 그 직원의 기분에 따라 일이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많은데,
오늘 만난 남편 담당 직원은 그 날 안 좋은 일이 있었던건지
남편은 그 직원의 "갑질"에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여권 사본이 없다는 말에 일단 남편을 안 좋게 째려보더니
저 쪽에 복사기가 있으니 복사를 해오라고 했답니다.
한 장에 10센트였는데, 남편이 하필 지갑을 안 가져왔습니다.
체류허가에 필요한 돈은 제가 지난번에 반납했고, 돈이 필요할 거란 생각을 못해서
서류만 달랑 들고 자전거 타고 집을 나섰던 남편이었습니다.
돈이 급하게 필요하면 핸드폰에 구글 페이가 있으니까! 하는 게 남편의 신조지만
저는 매번 당부합니다. 오스트리아나 독일은 아직 현대화가 되어있지 않아서
현금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다녀야 한다고...
10센트도 없다고 하니 직원의 화를 더 돋운 모양입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에 그냥 해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했는데
직원은 무시...
남편은 급한 마음에 옆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에게 10센트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모르는 사람은 바로 지갑에서 10센트를 꺼내 주었습니다.
남편은 그걸로 여권을 복사해서 다시 그 직원에게 갔습니다.
그 모든 과정들이 걸리는데 길어봐야 3분 걸렸을 겁니다.
그런데 직원 왈, 나 다음 약속 있어서 바쁘니까 나중에 와!
다음 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면 아무 말 안 할 텐데
사무실은 텅~~ 비어있어서 남편은 황당해했습니다.
아니 아무도 없잖아요. 여기 이렇게 복사해왔는데 처리해주세요!
직원은 계속 바쁘다는 말만 하고 너와의 약속은 이미 끝났으니
다시 약속을 잡고 오라고 했답니다.
남편과의 약속은 분명 30분으로 잡혀있었을 텐데
남편도 순간 당황해서 따지질 못한 것 같습니다.
남편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뭔가 분했나 봅니다.
10센트.... 우리나라로 따지면 10원밖에 안 하는데
상냥한 직원이라면 그냥 해줄 법도 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거슬리게 한건 그 사람의 눈빛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외국인을 차별하는듯한 나치의 눈빛...
남편은 몰도바라는 동유럽의 작은 나라에서 왔습니다.
유럽 최극빈국에서 왔지만 남편은 자기 국적으로 인해 주눅 들거나 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유쾌한 젊은이(?)입니다.
제가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제가 예민한 거라고 하는 사람인데,
본인이 그렇게 느꼈다고 할 정도면 진짜 그런 겁니다.
그 직원이 봤을 땐 제 남편도 같은 백인이지만 외국인이죠.
독일어를 잘 구사하지만 누가 들어도 악센트가 있는 독일어고
몰도바라는 작은 나라에서 온 데다 지갑도 없이 어리바리했던 게
그 사람 눈에 거슬린 겁니다.
사실 전 길 가면서도 이런 눈빛을 받거나 외국에 나가면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중국어 인사도 무시하는데 좀 익숙해졌는데
인종차별을 받을 일 없는 남편에게는 충격이었나 봅니다.
Arschl*ch!
영어로 치면 애쓰홀과 같은 뜻의 욕인데
남편은 양반 같은 사람이라 이런 말 진짜 안 쓰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근데 욕하면 뭐합니까...
빨리 약속이나 다시 잡자 하고 온라인에서 가능한 약속 날짜들을 확인하는 게
제일 가까운 게 3주 뒤입니다.
Arschl*ch!!!
저도 욕이 절로 나옵니다. ^^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일 처리가 빨리 될 수 있게 준비를 잘 못 해온 우리의 잘못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선에서 끝날 수도 있는 일을, 작은 것 하나 꼬투리 잡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리는 게
좋은 업무의 자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비엔나 지하철에서 본 코카콜라 광고판에 쓰여 있는 말입니다.
"나는 내 직업이 중요하지 않다고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직원 아저씨에게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제 결혼 문제 때문에 자주 연락했던 한 한국 대사관의 직원분이 생각납니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모든 대사관 직원분들이 친절하신 게 아닌데...
이 분은 남달리 본인의 일에 좋은 직업 정신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서로 소통이 잘못돼 제가 어떤 서류를 깜빡했을 때도
감정적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말씀해주셔서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끝까지 해결될 때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제 문제를 지켜봐 주셨습니다.
그분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이 모두 이메일, 전화로 처리했는데도 말이죠!
이 분은 진짜 제 평생의 은인...!
근데... 살다 보면 이런 사람 있고 저런 사람 있는 거겠죠.
그냥 남편이 다음번에 갔을 땐 같은 직원을 만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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