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도바에 방문한 기간이 휴가 때라 아니라 시부모님은 평일에 일하시다가 일요일이 되어서야 우리 부부와 넷이서 함께 외출할 수 있었다. 오늘 시아버지 쪽 친척분을 만나러 간다는 얘기만 듣고 집을 나섰는데, 알고 보니 몰도바 구경시켜주시고 저녁때나 가는 일정이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일어나는 일. ^^; 여행할 때 목적지를 인터넷 검색 없이 가본 적이 거의 없는 나에게는 이것조차 새로운 경험이다.
차를 타고 도착한 이곳은 꽤 유명한 곳인 것 같다. 나중에 팻말에 세워진 지도를 보고야 이곳 이름이 "Orheiu Vechi [오르헤이우 베키]"라는 걸 알았다.
몰도바 중앙에 위치한 Orhei 시에 있는 곳인데 고고학 유적지로 보호받고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이렇게 멋진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위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사이로 물이 흐르는 구조. 이곳에서는 개발되지 않은 날 것의 자연을 맘껏 누릴 수 있어서 좋다.
내 핸드폰과 미흡한 사진 기술로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 없어서 아쉽다.
언덕길을 오른 후 죽 가다 보면 교회가 하나 보인다.
일요일이라 교회에는 방문한 사람들이 많았다. 갑자기 시어머니가 나를 교회 안으로 이끌고 들어가셨는데, 그 안에서는 결혼식이 진행 중이었다. 신부님이 신랑 신부를 축복하고 주변에는 가족 친지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다들 문 앞에서 좁게 서 있어서 나도 뭔가 그들의 가족처럼 얼떨결에 서서 구경하게 되었다. 신부님이 신랑 신부를 축복해주고 계셨는데, 이런 신성한 자리에서 나도 축복받기를 바라는 시어머니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내부가 굉장히 화려하고 예뻐서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결혼식 중이라 찍을 수 없어서 아쉽..
이 뒤에도 결혼하려는 다음 신랑신부팀(!)이 있었다. 신부들이 특히 예뻤던~~ 이 곳에는 동양인이 정말 없어서 나는 어디가나 시선을 받는 편이다. 내 옆에 은근슬쩍 다가와서 신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꼬맹이들. 내가 루마니아어로 Bună!(안녕) 라고 인사하자 놀란 눈을 하며 웃고는 도망간다. ㅋㅋ
교회 뒤쪽에는 뒤뜰과 새를 키우는 새장도 있고, 성직자들이 지내는 별채가 따로 있었다.
몰도바는 숨은 고양이 찾기 하기 딱 좋은 곳이다. 툭하면 담벼락이나 화단에 가만히 앉아있는 녀석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소품처럼 화분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니... 진짜 시선강탈이다. ㅜㅜ
남편이 손으로 만지고 팔을 올려도 대꾸도 없이 잠만 자는 냥이들 ㅎㅎ 여기 고양이들은 특히나 작고 예뻐서 나중에 여건이 되면 한 마리 데려오고 싶다...!
교회 보고 이제 여기는 끝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지하로 통하는 통로! 뭔가 관광코스 같지만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더 궁금하다.
들어가 보니 위아래 사진을 합친 것만큼 거대한 절벽 아래로 통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바라보는 경관은 또 달랐다.
옛날 수도승들이 머물렀다는 굴은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낮고 차가운 곳이었다. 당시 힘들었던 수도자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체험해 볼 수 있던 곳...
어두운데 불빛이 충분하지 않아 남편이랑 손잡고 가고 있는데 어느 수도자님께 혼이 났다. 이런 신성한 곳에서 남녀가 손을 잡으면 더 이상 신성한 곳이 아니라며... 이곳에 출입할 땐 여자들은 머리에 무언가를 써서 가려야 하는데, 친절하게 들어오는 입구에 많은 스카프들이 걸려있다. 남편은 이런 종교적인 것을 무척 싫어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여기에 왔으면 여기 법을 따라야지.
교회를 빠져나와 점심때가 되어서 식당을 향했다. 우리가 갔던 식당을 다시 구글맵으로 찾아봤는데 이 근처 식당들은 다 유명하고 맛있는 것 같다. 다들 별점들이 네 개 이상으로 평이 좋다.
우리가 간 식당에서는 몰도바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전통 몰도바식으로 식당이 꾸며져 있어서 볼거리도 많았다.
자리에 앉아서 받게 된 러시아어 메뉴판. 몰도바는 예전에 소련의 지배를 받아 러시아어를 썼었는데, 지금은 루마니아어가 공용어지만 아직도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어딜 가든 쉽게 루마니아어와 러시아어가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야 거의 루마니아어를 쓰지만, 어른들 중엔 옛날에 러시아어만 배워서 루마니아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나라 자체에서 러시아어를 안 쓸 수도 없는 상황.
그래서 종종 한쪽은 러시아어로 말하고 다른 한쪽은 루마니아어로 말하는데 서로 말이 통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시아버님이 종업원에게 뭐라고 하니까 메뉴판을 다시 가져다준다. 이번에는 루마니아어 메뉴판. 사실 시댁 가족들은 두 가지 언어를 다 쓸 수 있지만, 그냥 괜히 애국자인척 루마니아어 메뉴판을 달라고 한 것이라며 웃으시는 시아버지.
루마니아어는 영어 알파벳과 거의 같아서 이제 나도 알아볼 수 있다. 두 번째 줄에 내가 집에서 가끔 요리하는 러시아 음식 보르쉬도 보인다.
1유로가 20 레이 정도니까 45 레이면 2유로가 조금 넘는 것이다. 이곳에선 비싼 레스토랑이지만 우리 돈으로 삼천 원꼴이니 물가가 정말 싸다.
내가 있으니 메뉴 선택에 더욱 신중하신 것 같다. ㅎㅎ 집에서 해 먹기 힘든 음식 위주로 주문~
식전 빵과 음료가 먼저 나왔다. 콤포트라는 이름의 음료는 설탕에 절인 과일을 물에 타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의 매실청과 비슷한 것 같다. 우리가 마신 콤포트는 살구가 들어갔는데 새콤달콤한 게 맛이 좋다.
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는데 처음 나온 음식은 가지 음식. 오른쪽은 우리나라의 가지무침과 비슷하지만 토마토로 양념된 것이고 왼쪽은 가지 캐비어인데, 말 그대로 가지를 캐비어처럼 만든 음식이다. 가지를 숯불에 구워 저민 다음 생양파와 내어지는 요리인데, 식감이 육회 같으면서 고소해서 꼭 한국식 반찬 같았다.
그리고 새콤한 맛의 닭 수프.
옥수수빵, 달걀, 돼지고기, 코티지치즈라는 생소한 조합이지만 은근히 잘 어울렸던 음식.
밥 먹는데 옆에서 닭들이 꼬끼오하고 목청 높여 울어댄다. 이곳 오르 헤이는 시골이라 소와 닭을 보는 것이 흔하다. 뭐 도시인 키시나우에서도 닭은 볼 수 있지만... 아무튼 자연친화적인 몰도바다.
후식으로 나온 차와 단호박 케이크. 단호박이 들어간 디저트는 처음 먹어본 것 같다. 한국에서야 단호박 들어간 떡도 많고 한데... 아무튼 단호박 들어가서 괜히 반가웠던 음식. 초코색의 케이크는 무슨 케이크인지 모르겠지만 맛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한 번 구경하고 나가자는 시어머니. 본인이 아시는 영어단어들을 최대한 사용해 열심히 설명해주시고 때때로 남편 찬스를 써 통역을 시키셨다.
몰도바 옛날 주방의 모습. 큰 화덕이 눈에 띈다.
이런 지붕들도 정감 있어서 좋았다.
한쪽 문이 열린 비밀스러운 장소가 보이길래 우리가 기웃거리니까,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오셔서 흔쾌히 구경을 허락하셨다.
들어가 보니 엄청난 양의 절임들~~ 우리가 좀 전에 마셨던 콤포트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콤포트는 살고말고 다른 과일로도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처럼 절임 문화가 발달한 이곳에서는 별 걸 다 절인다. 심지어 수박도!! 수박 절임은 정말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
방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예쁘게 수놓아진 베개와 이불은 옛날에 집안에 딸들이 하나씩 결혼할 때마다 혼수로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자수 같은 것엔 관심이 없는데 여기 와서 보니 수놓아진 베개와 커튼들이 참 예쁘다. 나중에 또 가게 되면 사 오고 싶은 물건들~
단체 손님을 모시는 듯한 홀로 가보니 양탄자로 화려하게 벽이 장식되어 있고 고추가 가득 천장에 걸려있다. 몰도바도 마늘과 고추를 많이 먹는데, 특히 고추는 공기 정화 효과가 있어서 이렇게 실내에 걸어놓는다고 한다.
이곳 식당도 자급자족에 예외가 없다. 따끈따끈한 메추리알이 가득한 메추라기장, 염소들도 보이고 화단에는 통통하게 잘 익은 파프리카도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목적지인 남편의 고모님 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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